by 홈페이지관리자 posted Aug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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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png

 

소설로 위대했던 작가들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사실 좀 두려운 일이다. 픽션의 바다에서 보여주었던 세계관과 문장들이 소소하게 개인화하면 서 신비감이 사라지고 사변의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이다. 이리저리 발표했던 잡문들을 모아서 계통도 없이 편집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75세) 씨가 산문집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를 냈다. <인생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뻔한데 뭐, 그렇게 힘들게 갈 것 있나>, <왜 그 따위로 소설 쓰는 거요>, <늙으면 흙내가 고소해진다는 말>이라는 큰 제목 밑으로 37편의 에세이가 펼쳐진다. 3편을 빼고는 이 번에 모두 새로 쓴 글들이다.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는 에세이도 문학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순이 삼촌》이나 《변방의 우짖는 새》,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탈고한 시점에서 30여 년이 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젊고 팽팽하다. 나 이 들어감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옛이야기를 들려 주면서도 과시하지 않는다.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가 고전이 된 이 유가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에 있다고 느낀다. 출판사의 마케팅은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를 노년 에세이로 잡은 것 같지만 막상 책을 들 고 보면 문학의 힘에 대한 믿음과, 사회 정의에 대한 투지, 그리고 제주 도와의 운명관계를 읽게 된다. 카뮈와 사르트르, 오에 겐자부로, 클로드 시몽 등 세 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한 명의 노벨상 수상 거부자의 발언과 행적을 비교한 《마지막 시민》을 읽노라면 그는 이들 중 사르트르에게 동지애를 느끼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사악한 전체인 사회에 맞서 저항한 ‘시민의 적이면서 최후의 시민’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인,  진정한 작가가 아닐까?”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81p)
 

제주 4·3사건을 처음으로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한 이듬해(1979 년),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서울사대부고 교무실에서 연행돼 중부서를 거쳐 보안사에서 고문을 받았다. 1980년 5·18이 나던 해에도 끌려가 20 일 구류를 살았다. 《순이 삼촌》은 불온도서로 분류돼 10년간 판금당했 다. 그는 한때 ‘그래 안 쓰고 살면 그 또한 어떠랴’라고 생각하며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글쓰기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여겼다. 술 마시고 마포 경찰서 앞으로 진군하던 나날들, 그는 인터뷰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었 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산문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고령인데 대단하십니다. 출판사에서 선인세로 1천만원을 주면서 에세이를 쓰라고 하더군요. (웃음) 한번 본격적으로 써보자 싶었습니다. 영문학에서는 에세이를 ‘문학’으로 간주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신영복의 《옥중서 신》을 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요? 하지만 나이 드니, 둔탁해지고 느 려집니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은 못 쓰겠어요. 1시간 쓰고 나면 멀리 초 록색을 바라보며 쉬다 잠깐 졸고 다시 씁니다. 자연에 감정이 이입되면 글이 잘됩니다. 대상에 몰입하고 인물과 동일시됩니다. 글이 한창 잘나 갈 때는 아내와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말을 안 하게 돼요. 아내가 기분 나빠 하는 걸 느끼지만 어쩌겠어요. 하지만 어디 외출하고 들어와 술 두 어 잔 나누노라면 대화도 잘 되고 노래도 함께 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동급생인 시인 양정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 고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제주에 사는 노모를 뵈러 자주 비행 기를 탄다고 한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젊었을 땐 슬픔과 눈물을 두려워하고 외면했어요. 나이 드니 앞뒤 문맥 과 상관없이 눈물이 잘 나요. 아내가 보고 있던 TV드라마를 어깨너머 흘낏거리다가 극중에서 누가 슬퍼하면 나도 펑펑 웁니다. 누선이 열렸 는지 조건반사적으로 눈물이 쏟아져요. 아내가 뒤돌아보면서 “또 울어 요?“ 합니다. 이게 좋은 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로서는 유리합니다. 여성적 감수성이 생겼다는 것이거든요. 제가 원래 마초적, 아니 남성적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여성성에 대해 잘 몰랐어요. 제주해녀들의 항일 투쟁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바람타는 섬》을 한겨레신문에 연재했을 때도 독자들이나 여성운동가들이 “여성 등장인물들을 남자들의 꼭두
각시로 그렸다”며 비난한 적도 있어요. 이제 늙어서 좋은 점은 슬픔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고 여성성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노경에 이르면 지난날의 삶이 슬픔을  두려워하고 눈물을  외면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슬픔을 외면한다는 것은 죽음을 외면한다는 뜻이다. 이제 노년의 나에게 슬픔이 자주 찾아온다. 늙으면 성샘은 줄고, 눈물샘이 더 발달하는 것일까?  (13p)


독자들에게 가장 각광을 받는 에세이가 《나는 사과한다》라고 들었 습니다. 이것을 표제로 하고자 하셨다는데 무엇을 사과하려고 하셨 습니까?

사과라기보다는 각성이라 할 수 있겠지요. 브레히트가 “아우슈비츠 이 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개탄했던 그 심정으로 저는 문학 을 했어요. 4·3사건을 쓰지 않고 서정시를 쓸 수는 없다고. 3만 명이 학 살당한 절대적 진실에 대해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공포의 시대에 어떻게 서정시를 쓰겠는가. 1948년의 제주 참사는 역대 독재정권에 의해 철저 히 금기의 영역으로 묶인 채 반세기 넘도록 망각을 강요당했지요. 생존 자의 논리에 들어 있는 기억을 강제로 지우려는 권력행위는 기억의 타 살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피해자들은 스스로 기억을 지우려는 기 억의 자살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망각에서 기억을 구해내야 한다고 결 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흐르고 군사독재는 물러 났어요. 참상을 리얼하게 그리는 것도 좋지만 공포는 연민을 압도하기 마련입니다. 한 발짝 물러나 비극에 연민과 서정, 웃음을 삽입해도 좋겠 다 생각해 쓴 글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등한히 하거나 무시했던 나무와 꽃에게, 달과 강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시에 대해서도 사과한다. 그리고 싸우는 동안 증오의 정서가 필요했고, 증오가 가득한 가슴으로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속이 느끼했는데,  이제 나는 그 사랑이란 두 글자에 대해서도,  그것을 노래한  사랑의 시에 대해서도 머리를 조아려 사과한다.  (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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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제주 4·3사건을 떼어놓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대학생 때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실렸 던 《순이 삼촌》을 읽고 가슴이 먹먹하던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4·3사건은 선생님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지요?

먼 과거 속 3만 명의 죽음은 실감으로 와 닿지 않은 추상적 숫자처럼 보 였어요. 그 추상적 숫자에서 구체적인 개별적 죽음의 피와 살과 비명을 드러내는 일이 제가 하려는 일이었습니다. 4·3사건이 일어난 지 30년 만 에 제가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썼습니다. 저희 가족은 4·3사건으로 피란 간 후 고3 때까지 성내에서 살았는데, 작가로서 그때의 생활을 작품 속 에서 되살리기 위해 제주에 자주 내려갔지요. 창비에 발표하고 나서 잡 혀가면 어쩌지 조마조마하긴 했는데 별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용기 를 내어 <도령마루의 까마귀> 등 4·3에 대한 소설 몇 편을 잇달아 더 발 표했어요. 이듬해 단행본이 나오고는 제주도 출신 운동권학생들이 제 주변에 모여 제주도 사투리를 써가며 독서친목회를 하고 그랬어요. 그 러다 명동 YWCA집회에 그 친구들이랑 나갔다가, 책 가진 학생이 잡혀 가는 바람에 저도 끌려간 거지요. 해병대 출신이라 맷집이 있다고 자부 했었지만 아무 소용없었어요. 엄청나게 고문을 당해 군인과 순경만 보 면 놀라는 사람이 되었어요. 5·18 나고 또 잡혀 들어갔을 때는 차라리 자 살해야겠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한 1년이상 글을 쓸 수 없었어요.


<순이 삼촌>에 대한 반응은 어땠습니까?

호의적인 반응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독자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과 불 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작품 속에 묘사된 참상들이 너무 충격적이어 서 꺼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국가가 민중을 보호하는 대신 민중을 파 괴해버린다면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을 품는 것은 두려운 일이겠지요. 보통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은 작은 슬픔일 지 모릅니다. 동족에 의한 학살이야기를 뭐 하러 쓰느냐, 이적 행위 아 니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평단에서도 무기로서의 문학, 포스 터 문학, 슬로건 문학이라고 했어요. 


교사 생활 20년동안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하셨지요?

서울사대부고에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재직했어요. 이때 《순이 삼촌》, 《변방에 우짖는 새》, 《아스팔트》와 같은 소설을 썼지요. 글쓰기에 전념 하고 싶어 담임은 딱 한번만 했습니다. 그때의 2학년 4반 제자들이 31회 김서중(성공회대 교수), 전현수(경북대 교수), 강재훈(한겨레신문 사진 기자) 등이지요. 이때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왕성한 시절이었어요. 더 열 심히 쓰려고 20년 만에 퇴직하고 전업작가로 돌아섰는데 이후의 20년 간을 비교하면 생산량은 별 차이 없었어요. 느슨해지고 술도 많이 마시 고… 글만 가지고는 안 된다 싸워야 한다며 저항감에 불타 떠들고 몰려 다녔지요. (웃음) 그러다 보면 그게 작품활동인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심 지어는 “안 쓰면 또 어떠랴” 싶기까지 하더라고요. 40대 중년이 20~30대 청년들과 함께 이상을 추구했달까? 돈키호테의 꿈을 좇았다고 할까?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책도 읽고 사회정의에 대한 노래를 불렀어요. 한 바탕 아름다운 꿈을 꾼 것 같아요.


지금 집필 중인 작품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역시 4·3사건 을 주제로 한 장편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순이 삼촌》을 쓸 때는 금기의 영역에서 ‘어떡하든 드러내야 한다’는 욕망이 컸어요. 만천하에, 백일하에 드러내야 한다는 주의 주장 이 컸다고나 할까요. 지금 이걸 또다시 쓴다면 그때와는 달라야 해요. 이 커다란 인위적인 재난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념문제를 떠나서 인간 의 이야기를 들여다봐야지요.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에 의한 재난 앞에 서 인간들은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 국가는 무엇이고 국민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자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여성이 주요인물로 나옵니 다. 소년의 이야기이지만 이 소년의 누나가 페미니스트이거든요. 제 소 설에서 볼 수 없었던 성격의 여성이지요. 해촌에서 태어났지만 해녀 되 길 거부하고 중산간으로 가서 목축업을 일으키는데, 말 배를 몰아 육지 로 가서 말 무역까지 하는 여자예요. 두 권짜리 장편인데, 글쓰기가 느 립니다. 그래서 완성되는데 오래 걸릴 거라 예상합니다. 사실 치매방지 용으로 쓰는 겁니다. 하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글: 김현숙 前 TV저널 편집장

사진: 임혜진